[Season 1] 기계치 일러스트레이터의 VR 비행 도전기
[Chapter 10] 보라보라섬의 실기비행
1. D-Day: 접속
“후우…”
나는 VR 헤드셋을 쓴 채 심호흡을 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조종간이 미끄러울까 봐 파자마에 슥슥 문질렀다. 오늘은 드디어 기초 과정 수료 실기 평가가 있는 날이다.
디스코드 알림이 울렸다.
[공지] 실기 평가 10분 전입니다. 훈련생 전원 보라보라섬(Bora Bora) 채널로 접속하세요.
이번 평가에 참여하는 훈련생은 나를 포함해 총 4명. 교관은 무작위로 호출 부호(Call sign)를 부여했다.
“카야 훈련생, 위치는 **‘3번기(Flight 3)’**다. 앞뒤 간격 유지에 신경 쓰세요.”
내 위치는 3번. 선두도 아니지만, 맘 편한 꼴찌도 아니다. 샌드위치처럼 낀 위치라 더 긴장됐다.
2. 10초의 간격
시뮬레이션 로딩이 끝나자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에메랄드빛 태평양 한가운데 떠 있는 보라보라섬 공항. 하지만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내 왼쪽으로 똑같은 세스나 152 두 대가 프로펠러를 회전시키며 대기 중이었고, 내 오른쪽에도 한 대가 있었다. 우리는 활주로 진입로에 나란히 섰다.
“좋습니다. 오늘의 실기 평가 미션은 ‘장주 비행(Traffic Pattern)’ 및 **‘편대 순환’**이다. 10초 간격으로 이륙한다. 1번기부터 라인업.”
엔진 소리가 활주로를 채웠다. 1번기가 스로틀을 밀며 활주로를 박차고 나갔다. 나는 속으로 카운트다운을 셌다. 하나, 둘… 여덟, 아홉, 열!
2번기가 출발하고, 다시 10초 뒤. 내 차례다.
“3번기, 롤링(Rolling).”
스로틀을 끝까지 밀자 등이 시트에 파묻히는 느낌(물론 기분 탓이지만)이 들었다. 속도계가 55노트를 지나자 조종간을 당겼다.
부웅-
바퀴가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의 부유감. VR 시뮬레이션이 주는 놀라운 선물이다. 앞서가는 2번기가 작게 보인다. 너무 가까워져서도, 멀어져서도 안 된다. 나는 레이 튜터에게 배웠던 대로 계기판과 창밖을 번갈아 보며 간격을 맞췄다.
3. 하늘 위의 보고 (Reporting)
“3번기, 크로스윈드(Crosswind, 측풍 구간) 진입.” “3번기, 다운윈드(Downwind, 배풍 구간) 진입.”
구간마다 위치를 보고하며 활주로와 평행하게 비행했다. 아래로 보이는 보라보라의 바다는 보석처럼 반짝였지만, 내 신경은 온통 앞 비행기의 꼬리에 쏠려 있었다.
활주로 끝지점에 다다랐을 때, 교관의 지시가 떨어졌다.
“1번기, 터치 앤 고(Touch and Go) & 체크 턴(Check Turn). 후미로 이동하라.”
가장 먼저 착륙한 1번기가 바퀴를 땅에 튕기듯 닿았다가 다시 이륙했다. 그리고는 오른쪽으로 크게 선회하며 대열의 맨 뒤, 즉 4번기 뒤로 빠졌다.
이제 선두는 2번기다. 그다음은… 나다.
4. 리더가 되는 순간 (To be a Leader)
2번기가 뒤로 빠지고, 내 앞에 아무것도 없는 뻥 뚫린 하늘이 나타났다. 이제 내가 1번기, 즉 **선두(Leader)**다.
갑자기 책임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내가 속도를 못 맞추면 뒤따라오는 4번기, 1번기, 2번기가 줄줄이 꼬인다.
“카야, 쫄지 마. 그냥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는 거야. 하늘에 선을 긋는 거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침착하게 활주로를 향해 기수를 돌렸다. 파이널(Final) 구간. 활주로가 점점 커진다. 센터라인을 두 다리 사이에 끼우는 느낌으로.
끼익-
타이어 마찰음과 함께 부드러운 착륙.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다시 플랩을 올리며 스로틀을 밀었다. 다시 이륙.
“3번기, 나이스 터치. 우선회하여 후미로 붙어라.”
씨걸 교관의 짧은 칭찬(아니, 지적하지 않았으니 칭찬이다)에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5. Full Stop
조종에 집중하느라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모른다. 4번기가 선두가 되었을 때, 마지막 명령이 떨어졌다.
“전 기체, 풀 스탑(Full Stop, 완전 착륙).”
하나둘씩 활주로에 내려앉은 비행기들이 줄지어 보라보라 주기장(Parking ramp)으로 들어왔다. 엔진을 끄고 프로펠러가 멈추자, 디스코드 채널에 안도의 한숨들이 터져 나왔다.
“와… 진짜 손 떨려서 죽는 줄 알았어요.” “2번기 님 아까 바람 불 때 흔들리는 거 보고 저도 식겁했다니까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함께 하늘을 날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묘한 전우애가 생겨났다.
“수고했습니다. 각자 녹화한 비행 영상은 ‘리플레이 파일’과 함께 저장해서 제출하도록. 최종 평가는 영상과 로그를 분석해서 메일로 발송합니다. 이상 해산.”
6. V-LOG: 나의 첫 비행 일지
평가는 끝났지만, 나의 작업은 이제 시작이었다. 나는 제출용 영상 외에, 내가 비행하며 본 풍경과 우리 편대의 움직임을 편집 프로그램에 올렸다.
일러스트레이터의 감각을 발휘할 시간. 엔진 소리에 맞춰 배경음악을 깔고, 긴박했던 무전 소리를 자막으로 입혔다. 보라보라섬의 석양을 배경으로 4대의 비행기가 줄지어 나는 장면은 그야말로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영상 제목: 일러스트 파일럿, 태평양을 날다 (메타파일럿 3기 수료 비행)]
영상을 ‘메타파일럿 커뮤니티’에 올리자마자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와, 이게 게임이라고요? 진짜 비행인 줄…”
“저 3번기 착륙 진짜 부드럽네요.”
“저도 교육 신청하러 갑니다.”
7. 일러스트 파일럿 (The Beginning)
나는 수료증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더 이상 방구석의 기계치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 나는 일러스트 파일럿이다.
- [시즌1 프롤로그] 잿빛 캔버스 위로 튄 파란 물감
- 1장. 거대한 검은 덩어리
- 2장. 타이탄 PC방 사장님
- 3장. 나만의 조종간. (feat. 메타파일럿 대여)
- 4장. 비밀의 문 뒤에는 괴물이 산다
- 5장. 설치만 150기가? 인내심 테스트
- 6장. 유튜브 선생님과 과외 쌤, 그리고 VR
- [1교시] 나의 첫 번째 날개 (Control Surfaces)
- [2교시] 여섯 개의 눈 (The Six Pack)
- [3교시] 시동과 활주 (Start & Taxi)
- [4교시] 중력을 거스르는 힘 (Take-off & Climb)
- [5교시] 수평 비행과 트림 (Straight & Level, Trim)
- [6교시] 마의 구간, 착륙 (Landing & Flare)
- 7장. 가짜 하늘이 주는 진짜 어지러움
- 8장. 목에 깁스를 한 파일럿
- [7교시] 길 잃은 아이와 나침반 (Dead Reckoning)
- [8교시] 하늘의 보이지 않는 도로 (Traffic Pattern)
- [9교시] 구름 속의 산책 (Instrument Flying Basics)
- [10교시] 초록색 바늘을 쫓아서 (VOR Navigation
- [11교시] 신의 붓터치, ILS (Instrument Landing System)
- 9장. 단추 하나로 거인을 깨우다
- 10장. 보라보라섬의 실기비행 (Cessna 152 Checkride)
- 11장. “합격입니다, 카야 파일럿” (Final Checkride)
- [에필로그] 회색 벽에 걸린 파란 하늘, 그리고…
- [등장인물] 소개




